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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 스톰 : 가장 IT적인, 그래서 본능적 생존투쟁일 수 밖에 없었던.
    읽는다/독서 감상문 2016. 2. 11. 21:22

    사이버 스톰

    CYBER STORM




    매튜 매서

    공보경 옮김





    한 때 바이러스니 해킹이니 사이버 전쟁이니 하는 소재들이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단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세기말적인 감성을 느끼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신비스러우며, 알 수 없는 흐릿함. 가장 최신의 기술과 선구적인 영역을 소재로 삼고 있었지만 나는 그랬다. 하긴 천재 해커와 인공지능이든 초바이러스든 양자간에 펼쳐지는 이진법의 치열한 수 싸움 따위를 아무리 글로 표현해보았자,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의 눈엔 그리 비칠 수 밖에. 그러니 분위기라도 양껏 있어보이게, 아예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ㅡ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제 IT(Information Technology) 전문가인 저자가 '가장 현실적이게' 그려냈다는 사이버 테러를 소재로 한 종말 소설에 대한 소개를 읽었을 때 조금 두근거렸다. 그간 나에게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짧게나마 IT 정보를 다루는 일을 했던 경험! 어쩌면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 뭐 그런 거. 그리고 이 소설, '사이버 스톰'은 그런 내 기대를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이 글은 평범한 가족의 추수감사절 풍경을 그리며 시작한다. 주인공인 마이클은 철저한 생활밀착형 음모론자인 친구 척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다를 떨면서도 한켠으론 자신의 아내인 로렌의 부모를 마주할 걱정을 하고 있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이름난 명문가의 존재들. 그리고 그런 장인 장모 옆에서 로렌과 함께 서 있는 잘생긴 호남형 이웃 리처드도 신경이 쓰인다. 두살 난 아들 루크는 오늘도 천진난만하게 분위기를 밝히지만 마이클의 속내는 영 어둡기만 하다. 흔히 있는 평범하지만 평온하지만은 않은 가족.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슬슬 눈에 보이는 그런 시기. 그리고 재앙은 늘 그렇듯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시작은 계산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 줄이 줄어들지 않는 슈퍼의 계산대였고, 조류독감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뉴스였다. 갑자기 고열을 내며 앓는 아들 루크와 접속이 완전히 끊겨버린 인터넷. 평소 철저하게 '이런 사태'를 대비해오던 척은 마이클에게 마스크를 건네고, 이웃들은 걱정해주면서도 멀찍이 물러선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중국의 사이버 테러. 모든 것이 컴퓨터로 중앙통제되고 있는 거대도시는 순식간에 마비 상태에 놓여버린다. '마치 뉴욕이 이 행성의 다른 곳들로부터 분리되어 회색 눈구름 속에 홀로 소리없이 떠다니는' 상황이 된 것이다. (p. 139)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CNN이며 온갖 라디오 방송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져간다.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끊겨버린 아파트, 아니 도시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딘지 모를 지구 상의 누군가가 고작 키보드 몇 번 두드린 일 때문에! '아무도 자기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무언가가 세상을 공황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p. 115)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추워서, 씻지 못해서 괴로웠던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미로웠다. 분명 시작은 누군가의 사이버 테러였지만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은 그저 본능적 욕구의 해소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편리함의 그림자에 가려 인식하지 않았던, 아니 굳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의 위험성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마저도 무의미하다. 당장의 생존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이클이 살던 아파트라는 작은 공동체를 통해 그러한 사태에 이르렀을 때 행동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다. 극한 상황에서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주변을 생각하기도 하는 이중적이어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거기에 있다. 물론 한 쪽으로 격하게 치우친 이들도 있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며 무심하게 방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엮이고 엮이며 이야기는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마냥 원시시대처럼 먹을 것을 찾고 불을 구하고 물을 구하는 극한생존투쟁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근거리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 간에 소통을 하고, 무법지대처럼 변해버린 주변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스스로 자정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우연히 병원에 자원봉사를 갔다 인연을 쌓게 된 경관도, 거리를 헤매다 기적처럼 아파트로 흘러들어온 영민한 청년도 다 같이 그들의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어둠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악몽도 결국은 꿈일 뿐이다. 끝내는 깨기 마련이고, 저자는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의 매듭을 풀어낸다. 물론 더 나은 방향으로. 


    * * *


    사실 마지막의 마지막 장은 제법 인상적인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을 보는 기분이 들더라.

    어쩐지 그랬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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