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악마를 보았다 (2010) : 내 속의 새끼 악마 한 마리.
    본다/영화를 봤다 2010. 9. 7. 20:08
    악마를 보았다
    I Saw The Devil, 2010



    *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래서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가서 봐야 된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얘기다. 개봉한 지 좀 시간이 흘러서 그 영화에 대한 말이 ㅡ호평이든, 혹평이든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왠지 보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순수하게 내 스스로가 영화를 보고 느끼고 싶다는 욕심이 가장 크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글은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미뤄두기도 하고, 이래저래 타이밍이 안 맞아 개봉 직후에 보지 못한 영화의 경우는 '정말로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면 관람을 포기하기도 한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악마를 보았다' 역시 거의 그 관람을 포기하고 있었던 영화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보고 싶었던 영화였기에, 자세한 감상문이나 리뷰를 보고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냥 이리저리 들려오는 '잔인하다, 고어하다, 악마적이다 ' 따위의 단편적인 감상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 '운이 좋다' 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버려질 뻔 했던 이 영화의 예매권을 유효기간 직전에 찾아냈다는 의미의 운이고, 다른 하나는 관람을 포기했었더라면 후회했을지도 모를 영화를 놓치지 않고 봤다는 것에 대한 운이다. 솔직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잠시 몸서리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고, 영화 중간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돌려버렸던 적이 있었던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로서 충분히 괜찮은 작품이었다. 두 번 보라고 하면 고민을 좀 해보겠고, 남에게 추천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겠지만 말이다. ㅡ이 영화가 고어 영화가 아닌 것은 알지만, 고어한 영화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고, 난 고어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이 이 영화를 잔인하다 할 수 있게 만드는가.


        이 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얘기되곤 하는 것이 그 '잔인함'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피 튀기는 잔혹 행위들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피하지 않고 묘사하는 것으로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악마성'의 끝을 보여준다. 앞서도 말했지만 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 없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워낙에 '토할 정도로 잔인하다, 눈 뜨고는 볼 수 없다, 보다 나왔다' 따위의 말을 많이 들어서 각오까지 하고 들어가서 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며 영화를 돌이켜보던 내가 몸서리를 쳤던 것은 분명 그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잔혹 행위 때문이 아니다.

         경철(최민식)과 수현(이병헌). 이 두 남자의 '각각의 마지막 결단'이 보는 이를 소름돋게 한 이유이고, 진정으로 이 영화에서 '악마를 보았다'고 생각한 부분이며, 이 영화를 잔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행동에 그치는 일차원적 악마성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신체적인 아픔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을 쥐어 짜내려 드는 그 악랄한 발상 말이다. 물론 둘 중 누가 더 악마적이었느냐, 를 굳이 따진다면 아마 경철일 것이다
    ㅡ가장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이에게서 자기는 먹지도 않을 사탕을 뺏어 울리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레벨의 순수한 악의이다. 수현의 경우는 사실, 그의 행동이 경철에게 자신이 받은 것과 유사한 고통을 안겨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라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본래 '그렇지 않았던' 수현이 자신을 내던지며 내린 선택임을 감안했을 때, 양 쪽의 악마성은 그 우위를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던 나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 말이다.

         얼마 전 인셉션에 대한 글을 쓰면서 보는 이에게 놀자고 손을 내미는 느낌이라는 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악마성을 슬슬 눈치채는 게 어떻겠느냐고 떠보는 영화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악'의 편에 서 있는 주인공을 응원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쩔 때는 범죄자를 쫓는 경찰 쪽이 얄미워서 잡히지 말길 바란 적도 있다. 그런 건 사실 흔한 일이다. 왜냐면, 나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선 마음 놓고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심정도, 속사정도 잘 알뿐더러 정의의 편이어야 하는 경찰 쪽은 알고보면 나쁘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어찌보면 '그렇게 하라고' 유도를 당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의 경우 '그러한 유도 따위'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ㅡ둘 다 '악마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더 '악랄한 것'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좀 더 피튀기는 것을 보여달라는 게 아니라, 뭐랄까,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수현이 경철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면서 '나라면 이렇게 했을텐데' '경철은 저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 따위의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거다. 왜? 그러니까 슬슬 눈치채라는 얘기다. 내 안에 들어앉아 있는 새끼 악마를.



         글이 길어져버렸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머릿 속에 떠올랐던 글이 있어서 잠깐 그 중 일부를 인용해두려고 한다. 그 글은 물론 문학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예술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서다. 내 새끼 악마는 다시 숨어버렸으니 괜찮다는 얘기 대신이다.

    우리는 예술은 종교가 아니고 소설은 철학이 아니며 시는 좋은 행위의 모델을 (그에 관해서라면, 나쁜 행위의 모델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술은 기껏해야 실재의 재현,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모방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ㅡ 에드워드 사이드, '문학과 문자주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