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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문학의 숲 '차가운 밤' :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갔다.'
    읽는다/독서 감상문 2011. 2. 16. 23:23


    2011. 006.
    차가운 밤
    세계 문학의 숲 004
    바진 지음ㅣ김하림 옮김
        

         네 번째의 세계 문학의 숲은 여태까지 만났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읽히는 글이었다. 그건 중국의 대문호로까지 불리우는 '바진'의 글이 가벼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딘지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읽기 전까지만 해도 삼국지나 수호전 등의 고전을 제외한다면 읽은 적이 없는 생소한 중국 문학에 대한 걱정이 컸을 정도였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고유 명사를 제외한다면 그 언젠가의 우리나라를 살아가던 인물의 이야기라고 해도 믿겠다' 는 것이었을 정도였다.

         그런 '차가운 밤'은 전쟁 중이던 1940년대를 배경으로 꿈과 열정을 가진 젊은 지식인 왕원쉬안과 마찬가지로 고등 교육을 받은 그의 아내, 청수성, 그리고 그런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왕원쉬안의 어머니가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근대 중국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근대 역사에 대한 언급도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주인공 왕원쉬안에 대해서 말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죠.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방법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내는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으나 곧 사라졌다.
         "방법을 생각한다고? 내 보기에는 끌려가서 죽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어. 재작년에는 작년이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니, 작년엔 또 올해에는 좋아질 거라고 하고, 올해는 또 뭐라고 하려나. 해마다 나빠질 뿐이야!"
         어머니가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ㅡ p.111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꿈꿔오던 이상 대신 어쩔 수 없는 갑갑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왕원쉬안.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젊고 자의식이 강한 부인 수성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며느리가 곱게 보이지 않는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다. 본래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 꿈을 잃은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은 수성과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갈등을 일시적으로 덮는 데에만 급급하다.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텐데도 그는 끝끝내 그 어느 쪽의 입장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째서 그렇게 대립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의문을 해결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결국 그에게 있어 비극이 되어버린다. 왕을 가운데 둔 두 여인의 대립은 사소한 것에서조차 '의미없는 갈등'을 만들어내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위에 인용한 본문처럼, 그저 상대의 말에 반대를 하기 위한 반대를 하는 상황의 반복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참 안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왕원쉬안은. 이 쪽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이 쪽 편을 들며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한 남편의 행세를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반대 쪽으로 와서는 또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 약속을 깨버려 어머니를 실망시킨다. 그런 그의 모습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전쟁과 이어지는 피난 생활, 꿈을 꿀 기회조차 없어 보이는 막막한 현실을 살아가던 근대 중국의 청년들을, 근대 중국의 현실을 반영한 설정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런 성격이기에 그의 삶이 비극으로 끝맺어졌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선택들을 그는 포기하거나 진정으로 원하는 쪽이 아닌 방향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 자신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체면을 차리거나 하는 것이다. 거기다 미련은 많아서 자기가 그렇게 하라고 해놓고는 상대방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선택들은 타인, 특히 수성이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없으며 일종의 책임회피에 가깝다. 그는 결국 책임을 질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왕원쉬안의 성격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소설 초반 부분부터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결말지어지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완성되어 가던 그의 비극은 일본의 패전으로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사회 상황과 맞물려 더더욱 암울하게 그려진다.

         어찌보면 허무하기까지한 왕원쉬안의 짧은 인생은 줄곧 차가운 밤이었다. 밤이 오기 전에는 반드시 낮이 있듯이, 그에게도 밝게 빛나던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또 다른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될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까지 남기면서 말이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 남자의 삶을. 

    차가운 밤 - 8점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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