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터 (2011) : 권투하는 형제의 이야기.본다/영화를 봤다 2011. 3. 5. 20:51파이터
The Fighter, 2010
그러고보면 작년 이맘 때 쯤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을 그린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당시 그 평범한 영웅의 주위에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주었던 인물을 연기한 배우 산드라 블록이 각종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것도. 어쩌면 누구나 다 아는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영화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보다도 그의 주변에서 그가 성공하도록 도와준, 혹은 성공하는 계기가 되어준 인물들에게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영화 속에서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디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전설적인 복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 파이터는 사실 처음부터 미키가 아닌 그의 형 디키 워드(크리스찬 베일)을 카메라에 담는다. 미키보다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린 뛰어난 복서였던 디키, 현직 복서인 미키의 어린 시절부터의 우상이었던 디키, 형제가 사는 로웰의 별이었던 디키, 디키, 디키. 그래서 나는 착각을 한다. 디키의 영화구나, 하고. 물론 그건 체중 감량을 불사하며, 마치 실제의 디키 워드가 빙의한 듯한 연기를 보여준 크리스찬 베일, 베일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의도적으로 디키를 정중앙에 내세웠고 자연스레 나 또한 디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디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디키가 충격적으로 깨닫기 전에, 관객인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안타까움을 담은 시선으로 우리의 애처로운 디키를 지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나락까지 떨어진 디키를 뒤로 한 채, 주인공, 미키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야기는 예상대로 진행된다. 아무리 아슬아슬하고 절박하게 그려낸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주인공인 미키가 승리자가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미스런 사건을 겪고 주위의 도움으로, 정말로 자신을 위해주는 건지 알 수 없는 어머니와 약물에 중독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형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미키가 마치 그들 보란 듯이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이겨나가는 모습은 어찌보면 결국 미키가 선택하게 되는 길의 입구에 도달하기 위한 워밍업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일 없이 주위에 휩쓸리기만 하던 미키가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고, 주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원하는 길을 선택하기까지의.워드 형제, 디키와 미키.
예상대로의 전개기에 굳이 자세한 묘사도 설명도 없지만 그렇게 어머니와 형 없이 이겨나가던 미키 앞에 출소한 형 디키가 다시 나타나면서 영화는 다시 한 번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변화를 겪고 만들어내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보다 섬세하게 묘사해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이라는 것도 있고 이래저래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하하. 역시 아무래도 디키에 대한 집중이 끝까지 풀어지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이 영화를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라 휴먼 드라마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정해진 게 아니겠지만, 복싱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역시 복싱보단 미키를 둘러싼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되더라. 그리고 그렇게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 *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실제의 미키와 디키가 잠깐 등장한다. 굳이 자신들이 누구라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그들이 말하는 모습만 보고도 누가 누구인지 금방 알겠더라. 그 영상 덕분에 크리스찬 베일이 얼마나 실제의 디키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는지가 대번에 느껴져서 흠칫 했을 정도. 이래저래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 만족스러웠다고 말하면 역시 너무 팬심이 지나친걸까. 하하.
파이터 -
'본다 > 영화를 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스 코드 (2011) :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야기. (2) 2011.05.08 M (2007) : 이미지의 혼란 속에 빠져버리다. (4) 2010.12.05 언스토퍼블 (2010) : 통제를 벗어난 일상이 주는 긴장감. (2) 2010.11.29